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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언더우드는 미국 북 장로교회가 한국에 목사로 파송한 최초의 선교사였다. 그는 의사가 아니었지만 제중원에서 알렌을 도와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또 에비슨이 한국 선교사가 돼 오록 일조하고 제중원 발전을 위해 직간접적으로 에비슨과 협력하며 후견인 역할을 했다.
제중원과 언더우드
언더우드는 영국 태생이었다. 그는 소년 시절에 프랑스에서 공부하기도 했고 가족의 미국 이주로 뉴욕에 정착하게 되었다. 언더우드는 뉴욕대학을 졸업하고 뉴브런즈윅 신학교를 마쳤다. 신학교 재학 시절에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인도에 가기로 결심하고 있었으나 일본에서 온 올스만 박사의 강연을 듣고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한국에 갈 지원자가 없는 것을 알고 주변의 조언에 마음이 변화되어 한국에서 자기를 부른다는 느낌을 소명으로 받아들이고 한국행을 결심하였다. 북장로교 선교 부토부터 1884년 7월 28일에 한국 선교사로 임명받고 그해 12월에 뉴욕을 떠나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오후 3시에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안수받은 한국 상주 성직자 선교사로서는 가 가장 먼저 내한하였다. 도착한 지 며칠 후에 제중원이 개원하자 개원 초부터 제중원에 합류하였다. 언더우드는 의예과 공부도 1년간 했던 경력이 있어 제중원에서 진료 보조, 역제사, 간호사 역할을 하였다. 의학생들에게 물리학과 화학 등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언더우드는 선교지에서의 의료선교 활동이 효율적이라고 판단하였다. 일본 선교 초기에 북장로교 선교부로부터 파송받아 1859년에 요코하마에 도착한 햅번 의료선교사와 한국의 첫 선교사로 내한한 알렌 의사를 보며 의료선교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인식하여 후에 선교 전문 잡지에 글도 발표하였다. 그는 의료활동 자체가 선교라고 보았다. 의료활동이 고통의 완화와 질병 치료에서 시작하여 영혼을 치유하고 구원할 수 있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그는 제중원이 양반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것도 선교활동에 유익을 준다고 판 다단하였다. 따라서 의료선교가 복음 전파에 충실한 시녀의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언더우드는 한국 선교역사를 쓰면서 의료선교가 이룬 다섯 가지 공로를 아래와 같이 정리했다.
- 국왕의 호의 획득
- 종두법의 소개
- 서울에 전염병 치료하는 병원 설치
- 콜레라 유행시 헌신적인 간호
- 청일전쟁 후 평양에서 홀을 비롯한 선교사들이 행한 희생적인 봉사
언더우드는 그 밖에도 한국사회의 근대화와 선교를 위해 많은 일을 한다.
- 영한/한영사전을 만들었고 문법책과 회화 책을 발산하여 한글의 대중화와 한국의 근대화에도 많은 기여를 했다.
- 성경 번역, 찬송가 편찬, 그리스도 신문 간행, YMCA와 조선기독교서회 창성 등 한국교회의 초석을 놓았다.
그의 형 존도 배후에서 거의 반세기 동안 동생의 한국 선교 사역을 위해 재정지원과 기도와 노력을 아끼지 않으며 선교의 동역자 역할을 하였다.
그는 1882년 제중원의 부인과 의사로 파송받은 호턴과 결혼하여 제중원 발전에 외조하기도 하였다. 후에는 토론토에 가서 에비슨을 선교사로 초빙해와서 그가 제중원을 개편하여 세브란스병원과 의학교로 발전시키는 데 간접적으로 공헌하기도 하였다. 언더우드는 1900년 뉴욕에서 열린 선교대회에 참석하지는 못했으나 글로써 이 병원의 활동상을 알렸다. 이러한 노력은 의료선교의 효율성과 병원을 살리려 한 맥락에서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