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스크랜턴(Willianm B. Scranton)
스크래턴은 제중원에서 활동한 최초의 북감리교 선교부 파송 의료선교사였다. 제중원에서 활동한 기간은 3개월 반 정도였다. 그는 코네티컷 주 뉴헤이븐에서 태어났다. 예일대학교를 졸업하고 컬럼비아대학교 의과대학을 마친 후에 오하이오 주의 클리브랜드에서 병원을 개업하였다. 처음에는 선교사가 되기를 거부했으나 투병생활 중에 마음을 바꿔 미국 북감리회에서 의료선교사로 내한하게 되었다. 그의 부인과 후에 이화여대를 창설한 그의 어머니 메리 여사와 함께 왔다. 실질적으로 아펜젤러보다 먼저 서울에 상주하는 최초의 감리교 선교사가 되었다. 이후 아펜젤러가 집을 구하고 정착을 하는 데도 도움을 주었다. 그는 제중원의 일이 분주한 것을 보고 알렌의 초청으로 1885년 5월 22일부터 그곳에서 함께 일했다. 주로 환자를 마취시키는 일을 도왔다. 그러나 제중원 조직과 알렌 밑에서 일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고 선교활동이나 제중원 운영방식에 대해서도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곧 헤론이 내한하게 되었고, 그해 6월 24일에 감리교 중심의 민간병원 설립을 계획하고 제중원을 떠났다. 이후 1885년 9월 10일부터 정동의 자기 집에서 환자들을 돌보기 시작하였다. 이곳이 후에 상동 병원이 되었다. 이 병원은 서민층의 진료에 더 큰 관심을 두고 진료하였다. 1887년에는 여자들을 위한 병원인 보구여관을 세웠고 상동교회도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1907년에는 조선을 떠나 일본에서 활동하며 말년을 보내게 된다.
헤론(John W. Heron)
헤론은 제중원 2대 원장을 지낸 의료선교사였다. 그는 1856년 6월 15일 영국에서 태어났으며, 14세에 회중교회 목사인 부친을 따라 미국 테네시 주의 녹스빌로 이민을 갔다. 매리빌 대학을 졸업하고 4년 동안 교직생활을 하였다. 1883년에 테네시대학교의 의과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 후 존스보로에서 18개월간 개업의로서 활동하였다. 뉴욕대학교의 의과대학에서도 공부하였고 블랙웰 아일랜드 병원에서 실습도 하였다. 그는 테네시 의대의 교수직 제안을 사영하고 한국 선교사로 지원하여 북장로교 선교부로부터 1884년 봄에 최초로 한국 선교사로 임명받았다. 그러나 임지 부임은 알렌이나 언더우드 보다도 늦어져서 부인 해티와 함께 1885년 6월 21일에 도착하였다. 그의 부인도 의사 가문 출신이었다. 헤론은 그때부터 1890년 7월 5일까지 제중원에서 활동하였다. 제중원에서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백내장 수술을 시술하여 성공시킨 일로 유명해졌다. 그러나 알렌과 더불어 의료기술 문제와 더 나아가 선교 방향 문제로 갈등을 빚고 많은 괴로움을 겪었다. 알렌은 조선의 정세를 고려하여 의료 활동을 통한 신중한 선교를 주장한 반면에 그를 비롯한 여타의 선교사들은 더 적극적이고 직접적인 복음 전파 활동을 주장한 것이 주원인이었다.
헤론은 알렌이 1887년 9월 조선공사관의 참찬관 자격으로 제중원을 떠난 후에 제중원의 2대 원장이 되었다. 아울러 고종의 시의 역할도 하였다. 그는 제중원에서 오전9시부터 오후 4시까지 공식 근무를 하면서 하루 60~70명의 환자를 돌보았다. 성경 번역에도 참여하고 문서 전도에도 관심이 많아 한국 성교 서회 창설에도 공헌하였다. 그는 정부로부터 이미 통 정대 부직을 제수받기도 하였다. 콜레라가 창궐했을 때 건강이 악화되었는 데도 멀리 떨어진 시골까지 가는 무리한 왕진 활동을 감행하다 결국 1890년 7월 26일 34세에 이질에 걸려 사망하였다. 고종은 서양인의 묘지 구역으로 양화진의 땅을 하사하였고, 헤론은 이곳에 묻힌 첫 외국인이 되었다. 그가 이 무렵에 내한한 서양인 중에서 가장 먼저 사망했기 때문이다. 그는 의료선교사의 사명의식과 기독교 복음 전파라는 궁극적인 목적의식을 갖고 있었다. 헤론은 지적이었고 열성도 있었으며, 의사로서 소임을 다하다가 자기를 희생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이 행할 헌신의 모범을 보여주었고, 한국 개신교 선교의 기틀을 다지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모펫은 1934년 북장로교 한국선교회의 70주년 기념식에서 헤론을 이상적인 의료선교사라고 그를 칭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