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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러스(Annie. J. Allers)

=러스-제중원

엘러스는 제중원에서 활동한 최초의 여자 의료선교사였다. 그녀는 미국 미시간 주 벌 오크의 목사 가정에서 태어났다. 1881년에 일리노이 주에 있는 록퍼드 대학을 졸업하고 보스턴에서 간호학교를 졸업한 후에 의과대학에서 수련하였다. 남자 의사의 여자 환자의 진료가 불가능했던 당시 한국의 상황에서 알렌의 요청으로 의학교육을 받은 간호사로서 여성 의료사역을 위해 1886년 7월 6일에 내한하였다. 한국 의료선교사상 최초로 제중원 내에 만들어진 부인과에 여성 환자만을 위한 봉사를 시작하였다. 그 후 명성황후의 어의로도 활동했으며, 정이품 격인 정경부인의 직급을 하사 받았다. 육영공원에서 근무한 적도 있었다. 그녀는 선교현장에서 의학을 비롯한 여러 가지 부족한 점을 느끼고 보완할 기회를 바라며 일했다. 배재학당 교장을 역임한 감리교 선교회의 벙커와 결혼한 1887년 7월 이후에는 병원 일을 사임하였다. 엘러스는 언더우드처럼 한국어를 다른 선교사들보다 비교적 빨리 습득하였다. 불어를 구사할 수 있어서 당시 프랑스인 가톨릭 선교사들이 편찬했던 한/불사 전을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이 그 한 이유가 되었다. 그녀는 이승만의 개인 영어교사 역할도 하였다. 북장로교 안에서의 선교사역은 그 후에도 계속하였고, 정신여학교를 설립하여 초기 한국 여성교육에 크게 공헌하였으며, 서울 YMCA의 창설에도 공헌하였다.

호턴(Lillias S. Horton Underwood)

호턴은 정규 의과대학을 나온 여의사로서 부녀 진료에 공헌했다. 언더우드와 결혼하여 한국교회의 초석을 다지는데 많은 협조를 했고, 이와 관련한 기록을 남겼다. 그녀는 뉴욕 주 알바니에서 출생하였다. 경건한 신앙 가정에서 자란 호턴은 인도 선교사의 체험담을 듣고 선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시카고에서 여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시카 고아동 병원에서 근무하였다. 그리고 1888년 3월 27일에 의료선교사로 내한하였다. 당시 미국에서도 여자 의사가 극소수여서 활동할 기회가 많았는 데도 굳이 한국에 온 것은 선교사로서의 소명의식 때문이었다. 호턴은 제중원을 사임한 엘러스의 뒤를 이어 부인과를 맡았다. 1891년에 와병으로 잠시 미국에 귀환했다가 헤론이 죽은 후 빈턴이 부임할 때까지 공백기를 메꾸기도 하였다. 대외적으로 왕실과는 명성황후의 시의 가 되었으며, 위안스카이의 가정 의도 겸하였다. 병원에서 근무하는 한편으로 집 부근에서 시약소를 운영하기도 하였다. 또 부녀자와 어린이들을 위해 '휴 오닐 2세 기념 진료소'를 세워 독자적인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1889년 봄에는 8년 연하의 언더우드와 결혼하여 오늘날의 북한지역으로 신혼여행을 겸한 선교지 탐방 여행을 하였다. 안전이나 맹수의 공격 같은 여러 면에서 신변의 위험이 있었지만 이를 무릅쓰고 외국인 부부로서는 최초로 여행을 감행하여 오늘날의 북한지역의 선교 가능성을 탐색하였다. 서양인에 대해 반감을 가진 지방 관리나 주민들도 만났고 맹수의 위험도 있었지만 가는 곳마다 의료활동을 펴고 전도 책자를 배포하여 복음 전파의 문을 열었다. 수많은 환자들이 소문을 듣고 몰려들어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생겼지만, 봉사에만 전념하였다. 호턴은 저술활동에도 힘써 많은 저서를 남겨 언더우드와 본인의 선교활동을 정리하여 그 연구를 위한 소중한 자료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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