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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Charles Power)
파워는 북 장로교회 의료선교사로 파송받아 제중원에서 일했다. 1888년 11월에 내한하여 1888년 12월부터 헤론과 함께 근무를 시작하였다. 사교성이 좋았고 한국어를 조금 구사할 줄 알게 되면서 한국 사람들이 그를 좋아하였다. 실력이 있는 의사였지만 신앙생활, 성수주일, 음주 등 여러 행동이 문제가 되어 선교사들 사이에서 조사를 받은 후 1889년 7월에 사임하였다.
하디(Robert. A. Hardie)
하디는 의료선교사였으나 오히려 부흥운동에 많은 족적을 남겼다. 그는 온타리오 주의 칼레도니아 태생이고 토론토 대학 의대를 졸업하였다. 토론토 대학 YMCA의 파송을 받아 내한한 하디는 1890년 9월 한국에 도착하였다. 10월부터 부산에서 의료선교사 활동을 시작하고 그곳에 정착하기를 원했지만, 1891년 정초부터 4월까지 제중원의 책임을 맡아 근무하였다. 이 기간은 헤론이 죽고 나서 알렌이 제중원으로 복귀하였다가 1890년 7월에 다시 참찬관이 되어 제중원을 떠나 병원 운영과 의료진 구성에 차질을 빚고 있을 때였다. 에비슨과 토론토의대 동문인 그는 의대를 졸업했지만 진료 경험이 많지 않아 본인과 환자들도 진료를 원치 않아 곧 임지를 옮기게 되었다. 그러나 에비슨의 제중원 발전책에 따라 1897년 5월부터 9월까지 그리고 1898~1889년 사이에 다시 돌아와 일하기도 하였다. 토론토대학 YMCA와의 선교 후원 계약 기간이 만료된 후에 미국 남감리회로 이적했다. 그 후 1903년 원산 부흥운동의 주역이 된 이래 의료활동보다는 부흥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장로교 선교사들에게 영향을 주어 1907년 대부흥운동의 발생을 견인하게 되었다. 1909년에는 협성신학교 교장직도 수행하였다.
빈턴(Cadwallader C. Vinton)
미국 북장로교 의료선교사로 하디에 이어 제3대 제중원 원장을 맡았다. 1891년 4월에 부인과 함께 내한한 빈턴은 제중원 운영비 문제와 선교 방법 문제로 다른 선교사들과 한 차례 갈등을 빚었다. 그는 조선의 당시 정세를 무시하고 선교에 열정을 가져 직접 진도를 행할 것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의학교육도 조선인은 과학적인 교육을 받을 만한 두뇌를 갖지 못했다는 인종차별적인 이유로 반대했다. 조선 관리의 전횡에 맞서 제중원의 재정관리 문제를 바로잡으려고 노력했다가 실패하고, 약값 유용, 제중원 내 예배실 부재, 전도활동 불가 등의 사유로 1892년 자택에 진료소를 개소하고 전도활동을 병행하였다. 그는 의료사업이 복음 전파에 실제로 도움이 되는 점을 인지하고 이를 적극 활용하고 싶어 하였다. 그러나 이 진료소가 다른 곳으로 옮겨지면서 제중원이 공중분해될 위기에 처해지기도 하였다. 한편 조선 정부 측에서 볼 때 빈턴이 1891년에 제중원에서 근무하기 시작한 후로 여름이면 휴가차 병원 문을 닫고 겨울이면 추위 때문에 닿고, 우천 시에는 일기불순으로 치료를 꺼리는 등의 근무태도 불량으로 말썽을 빚어 병원을 떠나도록 했다. 그러나 그 후 1896년에는 에비슨과 더불어 의사양성 교육에 동참하였다. 1898년 가을과 1899년 3~10월에 안식년을 맞은 에비슨을 대신하여 제중원에서 환자를 돌보기도 하고, 여의사의 양성을 주장하였다. 그는 선교에 관심이 많아 '그리스도 신문' 등의 출판에 많은 힘을 기울였고, 나병 구호사업에도 투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