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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즈(Esther Lucas Shields)
실즈는 간호사 양성의 선구자였다. 그녀는 1868년 펜실베니아 주의 테이로어빌에서 장로의 딸로 태어났다. 1891년 필라델피아병원 간호원양성학교를 졸업하고 세인트티모시병원에서 1년간 간호 훈련과장을 마쳤다. 북장로교 선교사가 되어 1897년 10월 14일에 내한한 후 제중원에서 간호 업무와 전도를 담당하다가 의학생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1901년에는 격무로 탈진하고 신경쇠약에 걸려 평양에서 요양하면서 전도활동을 이어갔다. 한동안 전도에 전념하던 그녀는 1904년부터 세브란스 간호양성학교 초대 교장을 지냈다. 그녀는 간호사에 대한 인식과 간호사의 자기 정체성이 없던 당시, 12가지의 간호사 생활수칙을 만들고 여기에 준하는 생활 관습을 통해 직업의식을 갖도록 교육했다. 1906년부터 1923년까지 세브란스의대 간호학교 초대교장으로 봉직하였다.
고든(Henry Bauld Gordon)
고든은 의사도 아니고 선교사도 아니었으나 병원 신축의 설계를 맡았다. 토론토대학 출싱의 저명한 건축가로 낙스 장로교회를 비롯한 많은 건축물을 설계하였다. 그는 안식년을 맞아 캐나다로 돌아간 에비슨으로부터 병원을 신축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에비슨의 요청에 따라 40명 수용 규모의 설계도를 무료로 작성해주었다. 그 후 제중원 신축을 위해 장기간 토론토의 건축회사를 떠나게 되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에서 파송받아 1901년에 내한하였다. 북장로교 선교부와의 계약에서 여비를 포함한 연봉 3,000달러가 책정되었으나 계약기간의 연장과 같은 변화하는 형편에 따라 조정되었다. 에비슨은 그 실질적 재정 부담은 세브란스임을 암시했다. 원래 1년 계약이었으나, 조선정부로부터 대지 구입 문제를 비롯한 병원 건축 문제에 대한 원활한 협조를 받지 못했고, 러일전쟁 등으로 공사가 지연되었다. 따라서 그는 3년간 한국과 중국에서 의화단사건으로 파괴된 교회와 션교 관련 건물을 재건할 무렵이었다. 에비슨은 1900년 뉴욕의 에큐메니컬 선교대회에서 연설한 후 클리블랜드의 부자 세브렌스를 만났을 때 고든의 설계도와 추정한 비용을 토대로 새로지을 병원의 예상 건축비를 10,000달러라고 말했다. 그 제시에 따라 세브란스의 회사로 새 병원의 건축이 시공되었다. 물가의 변동으로 비용이 증가되었을 때 세브란스의 추가 기부로 완공될 수 있었다. 공사는 중국인 해리 장이 맡았다. 고든은 한국에 있는 동안 세브란스 병원 외에도 서울 새문안교회, 연동교회, 중앙교회, 정신학교, 경신학교와 여러 선교사 주탁 등의 건축에 관여하였다. 신앙심도 깊어 외국인 주일학교 감독이 되어 성경 공부반의 리더로 봉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