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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레라 예방사업과 의료사업의 연합화
1894년 11월부터 새로운 체제로 출발한 제중원 의사들은 국가적 규모의 방역사업을 주도적으로 수행했다. 청일전쟁이 시작된 후 만주에서 전투 중인 일본군 내에서 발생한 콜레라가 점차 한국의 국경지대로 남하했고 평양 등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이를 알게 된 정부는 콜레라 병원을 설치하여 다음 해까지 운영했다. 정부에서는 에비슨을 방역 총책임자로 임명하고 경찰 인력과 재정을 제공하면서 방역에 관련된 전권을 위임했다. 에비슨의 지휘 하에 의료선교사들과 조수들은 조직적이고 헌신적으로 봉사했는데, 북장로회 소속의 간호원 아버클의 활약이 매우 두드러졌다. 콜레라 퇴치 활동에는 감리교의 버스티드 의사도 함께 협력했다. 결과적으로는 총사망자가 5,000여 명에 이르렀지만 선교사들은 2000여 명의 환자를 간호했고 그중 많은 수가 회복되었다. 조선 정부는 외무아문 독판 김윤식의 명의로 선교사들의 의료봉사에 대한 감사의 편지를 주한 미국 공사실 편에 보냈고, 신문에서도 선교사들의 활동을 크게 보도했다. 이때 서울뿐 아니라 지방의 진료소들도 콜레라 방역활동에 큰 역할을 했다. 서울과 지방을 막론하고 한국에 온 모든 선교사들이 현동하여 전국적인 콜레라 방역활동을 벌임으로써 선교사들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가 높아졌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연합 의료선교사업으로서 이러한 활동이 기초가 되어 후에 선교단체들이 연합하여 세브란스병원을 운영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제중원 외에 서울에서는 1888년부터 정동 구내에 '휴 오닐 기념 진료소'가 설립되었고 그 뒤 1898년 10월부터 1904년까지는 모화관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헤론의 뒤를 이어 제중 원장에 부임한 빈턴은 제중원을 그만둔 후 1897년 1월 진료소를 자신의 집에서 여학교로 옮겼고 1898년부터 윌더 진료소로 부르게 되어 상당수의 환자를 진료한 듯하다. 그러나 1900년 에비슨이 미국에서 돌아온 후에 세브란스 병원의 건립이 논의되면서 이 진료소는 폐쇄된듯하다. 휴 오닐 진료소와 윌더 진료소는 한국병원 선교사에서 상당히 흥미 있는 사례이다. 둘 다 제중원이 전도활동에 자유롭지 못한 것 때문에 생겼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두 진료소 모두 의사 자신의 집에서 진료를 시작했다가 규모가 커지자 별도의 진료소로 발전했다. 두 진료소는 제중원에서 기독교 종교활동이 자유화된 이후에도 전도와 의료를 병행하며 계속 운영되었지만 언더우드 부인은 전적으로 전도활동에, 빈턴은 선교회의 행정업무와 출판활동에 더 많이 헌신하면서 자연적으로 폐지되었다. 또한 1904년 제중원이 새 건물을 건립하여 체계적이고 수준 높은 의료활동을 수행할 수 있게 되자, 소규모 진료소의 존재 의의가 적어진 점도 폐쇄의 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여기서 잠시 한국 의료선교의 몇 가지 단계를 언급할 필요가 있다. 선교 초창기의 의료활동은 전도활동의 모태가 되었다. 기독교 선교가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 의료활동은, 한국인이 서양과 기독교에 대해 갖고 있던 편견을 제거하는 데 큰 역할을 했고, 선교의 문을 여는 데 중요하게 기능했다. 선교의 자유가 주어지는 1890년대에 들어서면 초기 선교의 문을 열기 위한 의료활동은 초기의 그런 역할을 뛰어넘어야 했다. 이때 북장로교는 물론 남장로교, 북감리교와 남감리교, 호주 장로교와 캐나다 장로교, 영국 성공회의 의료선교도 시작되고 있었다. 이것이 대체로 1890년대에서 1904년까지로 서울에서 시작된 의료선교가 지방으로 확장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이 시기는 의료선교가 복음선교의 방편으로서의 기능을 벗어나서 의료사역 자체가 직접 선교활동에 들어가는 되는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