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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비슨의 에큐메니즘에 관하여
지금까지 에비슨의 의료선교 활동을 제중원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는 왕립병원인 제중원이 설립된지 8년째 되는 1893년 6월에 한국에 도착하여 그해 11월 1일에 제중원의 책인을 맡게 되고, 에비슨은 왕립병원인 제중원을 기독교 선교기관으로 전환시켰고, 1899년 휴가를 계기로 병원을 통한 의료선교의 확대를 기하게 되어 세브란스 병동을 건축하게 되었다. 이 무렵부터 그는 장차 한국인이 자신들의 의료를 맡아야 한다는 비전과 신념하에 한국에서 서양의학 교육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되어 세브란스 의학교로 발전시키게 되었다. 에비슨의 한국에서의 삶은 헌신과 봉사로 일관되었지만 순탄하지는 않았다. 그는 일본이 한국을 강점한 뒤에 더 어려워진 여건하에서 사역을 감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은 선교사가 운영하면서 서양식으로 가르치는 세브란스의학교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1910년부터 의학교육을 4년으로 만들면서 졸업과 동시에 면허증을 받는 제도도 고쳐, 세브란스 졸업생에게는 졸업 후 시험에 합격해야만 의사면허증이 수여되도록 했다. 1914년 부터 1922년까지 세브란스 졸업생들은 의사면허 시험을 치러야 했는데, 이는 일제의 서양선교사에 대한 통제의 한 방법이었다. 이 제도는 1923년에서야 풀렸다. 그는 의료선교사로 병원사역 외에 의료 교육 사업과 연희전문학교를 운영하는 등 한국의 고등교육에도 깊이 관여했다. 이런 여건하에서 그는 의료선교사의 한계를 넘어서지 않는 선에서 한국의 왕실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고, 일제 강점기에도 한국인에 대한 애정을 놓지 않았다. 그는 그의 온화한 성품만큼 한국의 민족 문제에도 따뜻한 관심을 가졌다. 대한제국 군대가 1907년 해산되었을 때, 세브란스는 남대문 근처에서 일본 군대에 저항하다가 부상당한 200여 명의 한국 군인을 구하려고 노력했다. 3.1운동 때 세브란스 구내에서 독립운동이 모의되었고, 스코필드 교수 같은 사람들의 활동이 나타나게 된 것도 그의 지도하에 있는 세브란스의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 이런 관점에서 1923년 1923년 관동대지진 때 일본의 만행을 두고 범죄 행위라고 규정했던 것이 이해된직하다. 이런 점은 그의 한국 민족운동에 대한 자세를 일정하게 읽게 해 준다. 에비슨은 보기 드물게 에큐메니즘에 충실했던 신앙인으로, 교파의식이나 분리주의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그랬다면 한국에서 보여준 그의 교파연합 사업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캐나다 감리교회 출신이었던 에비슨은 그 교단의 파송을 받을 수 없게 되자, 언더우드의 권유대로 미국 북장로교의 파송을 받아 한국에 왔다. 북장로교 선교본부가 캐나다 감리교인인 에비슨을 자기 교단의 의료선교사로 파송하게 되었을 때, 장로교인이 아니어서 미안해하는 에비슨에게 선교부 책임자는 현지에서 감리교인으로 충실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고 했다. 그 말에 감동한 그는 오히려 장로교 선교사의 책임을 더 충실히 했다. 이것은 오히려 에비슨의 에큐페니즘을 더 교양시킨 좋은 사례라고 할 것이다. 에비슨의 에큐메니즘은 세브란스병원을 건축하기 위해 모금하는 과정에서나, 제중원의학교를 운영할 때에 다른 교파의 의료선교사와 협력하는 과정에서도 잘 나타났다. 그의 연합정신은 한국의료선교사협회를 통해 제중원의학교의 교수진을 확보하고 교재를 번역, 출판하는 데서도 잘 나타났다. 그의 주도하에 사립 세브란스의학교로 개명되고 다시 교단들의 연합교육기관인 '세브란스연합의학교'로 개명되고 다시 교단들의 연합교육기관인 '세브란스연합의학교'로 발전하는 데서도 그의 에큐메니즘이 빛나고 있었다. 캐나다에서 교수 생활을 마다하고 한국선교사로 오를 때 그에게는 3명의 자녀가 있었고 부인은 임신 중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소명감에 충실했고, 한국에 와서도 갖은 어려운 상황을 인내로 돌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