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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중원의 역사

제중원의 설립 당시 시대적 배경

니콜라 테슬라 2021. 7. 18.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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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중원의 설립 당시 시대적 배경의 이해

조선시대-선교사

병원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곳이기 때문에 매우 중시되어 왔다. 조선시대에도 병원은 그 업무가 중인들의 몫이긴 했으나 왕실을 담당하는 내의원 왕실의 종찬을 치료하고 고급 의관을 양성하는 전의감. 일반 백성을 치료하는 하급 의관을 육성하는 혜민서가 있었다. 주요 의서로는 널리 알려진 허준의 동의보감을 비롯해 여러 책들이 통용되던 시기였다. 17세기 초부터는 가톨릭 교회의 선교에 힘입어 조선에 한역 서학서들이 전래되는 가운데 서양 의서로 분류되는 샬의 주 제군징과 같은 책이 소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 의학의 한계를 깨닫고 서양의 의학을 수용적으로 인식하여 서양식 의료기구와 병원 설립의 필요성을 인정하게 된 것은 19세기 말에 개화파 인사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서구권의 당시 시대적 배경

서구 의술의 전래와 수용은 미국 개신교 선교사에 의해 선교 목적과 조선 정부의 서구의료 기술의 필요에서 추진되었다. 선교는 기독교회의 최고의 사명이다. 따라서 기독교는 그 시작 이래 선교활동에 의해 계속 확장되어 왔다. 교회의 역사는 선교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톨릭 교회로부터 이어온 서유 업 교회의 선교 전통은 종교개혁 이후에 개신교에서 계승되었다. 영국교회는 산업혁명 후에 경제력의 팽창을 힘입어 해외선교에 힘을 기울였고 미국 교회들도 19세기 초반에 해외선교를 시작한 이래 정치적 경제적인 안정을 이룬 19세기 후반부터 선교사들을 다수 파견하기 시작했다. 무디의 부흥운동이 그 한 계기가 되었다. 그의 주도로 성경학교가 설립되었고, 여러 지역에서 청년민려회의 활동이 부흥회를 통해 왕성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이러한 집회들로부터 해외선교에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은 1876년 해외 학생 선교자원 운동의 결성이었다. 수천 명의 젊은 학생들이 "이 세대 안에 세계 복음화를"이란 구호를 실현하기 위해 선교하는 일에 나서게 되었다. 이후 1895년에 아프리카 내지 선교부를 창설한 장로교의 피어슨과 학생 선교 자원 운동을 더욱 확장시키고 후에 노벨평화상까지 수상한 존 모트 그리고 미국 북 장로교회 해외선교부의 총무로 활동한 스피어와 브라운 등에 의해 선교의 열기가 더욱 고조되었다. 19세기 후반 조선에 파송된 미국과 캐나다 선교사들, 특히 제중원을 시작하고 이끌었던 선교사들 역시 이러한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많았다. 

조선의 시대적 배경

한편 조선정부는 시대 변화의 기운에 부응해 1876년에 문호를 개방하였다. 그러나 선교 금지 정책은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뒤에도 지속되었다.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미국과 1882년 5월 22일에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할 때도 금교 정책을 바꾸지 않았었다. 1886년 6월 4일에 프랑스와 체결한 조불 수호조약에는 '교회'라는 단어를 넣은 것을 허용했어도 금교 정책을 폐기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프랑스 신부들은 암암리에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조선에 대한 개신교 선교는 만주 쪽에서 시작되었다. 1873년 이후 김진기, 이응찬, 서상륜을 비롯한 의주 출신의 청년 6명이 스코틀랜드 교회의 파송으로 만주의 우장에서 선교활동을 펼치던 존 매킨타이어와 존 로스를 만나 기독교로 개종한 후 두 선교사를 도와 성서를 번역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그리하여 최초의 신약성경 한글 완역본인 예수 성교 전서가 출간되었다. 이후에 그들이 직접 권서인이 되어 국내에서 전도활동을 펼쳤다. 그중 서상률은 동생 서경조와 더불어 1884년 봄에 고향인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에 최초로 개신 교회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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