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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중원의 개원일
제중원은 1885년 4월 10일에 재동에서 개원되었다. 개원일에는 대해서는 여러가지 의견이 있다. 알렌의 일기에서는 4월9일에 외래환자 20명과 절단수술이 필요한 환자 등으로 더불어 개원하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제중원의 개원 날짜는 주장하는 이에 따라 조금 씩 차이가 있다.
- 이광린은 4월 10일 개원 설을 주장
- 민경배는 4월 14일 개원 설을 주장
- 박형우는 4월 9일 개원 설을 주장
- 알렌은 4월 9일부터 진료를 시작하여 4월 10일에 공식 개원을 주장 한다.
제중원의 개원은 한국 개신교 선교의 시작이자 세브란스 병원 및 의과대학 나아가 연세대학교 창립의 실질적 기점이다. 이는 서양식 근대 병원고 의학교육이 시작되는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고, 기독교 전파가 불허되던 상황에서 환자의 진료를 통해 그리스도의 정신을 보여주기에 가장 접근하기 쉬운 통로가 되었다.
제중원의 운영방식
제중원은 조선정부와 미국공사관을 통한 미국 해외선교부의 합의로 설립되었다. 조선정부가 이미 서양식 의료시설의 도입과 병원 설립의 필요성을 논의하던 때에 미국공사관이 병원 건립에 거중 역할의 하였다. 왕립병원으로서 행정과 재정상의 운영체제는 조선정부가 관장했으나 치료와 의학교육 및 경비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가 맡는 이원체제였다. 조선정부는 이미 개화의 물결을 타고 있던 상황에서 서양식 의료시설의 도입이 필요하였고, 그 설립을 논의할 때였다. 선교부로서는 조선에서 선교활동에 자유가 없었기에 선교부 소속임을 분명하게 할 수도 없는 실정이었다. 재정적인 면에서도 선교비가 충분하지 않은 형편이었기 때문에 조선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게 되어 쌍방의 의견이 합치되었던 것으로 짐작해볼 수 있다.
병원의 명칭
선교사들은 제중원의 설립을 선교의 전기로 삼고 운영체계와 재정문제에서 조선정부와 합작함으로써 병원 운영을 원할하게 할 수 있었다. 조선정부는 새로운 의료체제 도입계획에 따라 혜민서를 대신하여 서양 의술을 사용할 병원의 설립을 구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벼원에 광혜원, 제중원이라는 이름을 부여해여 혜민서의 기능을 잇게 하였다. 처음에 병원이 개설될 때는 병원 명칭을 광혜원이라고 하였다. 이는 고종이 4월 12일에 내린 이었는데, 4월 26일에 제중원으로 바뀌었다.
- 광혜원: '널리 은혜를 베푸는 집'
- 제중원: '사람을 구제하는 집'
병원 이름이 변경된 날짜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설이 있다. 통서일기에는 4월21일, 고종실록에는 제중원으로 개칭된 것이 4월26일 이라고 적혀있다. 에비슨이 병원을 개편하고 병원을 신축한 1904년 이후에는 제중원의 명칭이 세브란스로 바뀌었다.
병원 장소의 이전
처음 제중원이 개원된 곳은 재동 홍영식의 집이었다. 오늘날 헌법재판소의 서북쪽에 위치했다. 하지만 장소가 협소하고 접근성도 좋지 못하다고 판단한 알렌은 조선정부와 협력하여 1987년 기존의 재동보다 2.5배 정도 넓은 구리개로 병원을 옮겼다. 이곳은 오늘날의 명동성당과 YMCA 건물 근처로 추청되고 있다. 에비슨이 병원을 확장/신축할 때는 남대문 부근의 복숭아골로 옮겨 세웠다.
제중원 원장의 경질
초대 제중원장 알렌은 1890년 9월에 미국으로 파송되는 조선 사절단의 참찬관이 되어 사임하였다. 그의 후인으로 헤론이 책무를 맡았으나 병으로 죽고 토론토 의과대학 출신의 하디가 책임자가 되었고, 1891년 4월에는 빈턴이 그 책임을 이어받았다. 알렌은 1889년 9월에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1890년 7월 9일에 서울주재 미국공사가 되기 위해 다시 사임하였다. 제중원은 1893년 11월에 에비슨이 원장이 된 후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