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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중원의 역사

제중원의 발전과 개편

니콜라 테슬라 2021. 7. 21.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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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중원의 발전

제중원은 개원 이래 알렌과 언더우드 6월에 한국에 들어온 헤론과 함께 활기찬 첫해를 보냈다. 개원 첫해인 1885년에만 265명의 환자를 진료하였고 그중 대수술도 150여 건이나 되었다. 10,460명에게 투약하고 환자들을 진료했을 정도로 활발하게 의료사역을 전개하였다. 1886년 3월에는 서양 의약 교육도 실시하게 된다. 교수는 알렌, 헤론, 언더우드였다. 학생은 처음에 16명이 선발되었으나 시험으로 4명이 탈락하고 12명이었다. 그 후 의학교 명의의 교육이 정상적으로 계속되지 못하다가 에비슨의 부임 후에 제중원이 선교부 중심으로 운영됨에 따라 1899년에는 제중원의 학교가 새로 출발하게 되었다. 에비슨은 1900년에 처음 안식년을 가진 후에 학생 조수들을 조직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1901년에는 학생 수가 7명이었다. 선교회의 의학교육에 대한 인식도 달라졌다. 학생 조수란 말도 의학생으로 바뀌는 시점이었다. 1908년에는 제1회 의학 졸업생이 배출되었다. 병원 측이 직면한 큰 문제는 여자 환자 치료를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알렌은 남녀 구별이 엄격하던 조선시대에 새 병원에서 여자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기녀들을 고용하기도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그는 이러한 한국사회의 관습을 감안하여 여성 의료인의 파견을 선교본부에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1886년에 엘러 양이 1886년 7 워 4일 제물포를 통하여 입국하게 된다. 그녀로 인해 제중원 부녀과가 처음 신설되었고, 그녀는 왕비의 주치의가 되기도 한다. 그 후 결혼한 후에는 의료사역을 그만두고 여학교를 세워 한국 교육 발전에 기여하였다. 이어 여의사 호턴이 1888년 3월 27일에 도착하였다. 호턴은 엘러스의 결혼과 여성교육 분야로의 사역 전환으로 생긴 공백을 메웠다. 또한 왕비와 위안스카이의 주치의가 되었으며, 언더우드와 결혼한 후에도 선교사역을 계속하였다.

 

제중원-수술장면

제중원의 개편

1893년 7월에 내한한 토론토대학의 의과대학 교수였던 에비슨이 제중원의 새로운 책임자가 되어 병원 체제를 일신하였다. 에비슨은 1893년 11월 1일 부터 제중원 원장으로 봉직하였다. 병원은 건물과 재정을 비롯한 여러 면에서 문제가 많아 겨우 유지되고 있는 상태였다. 우선 병원을 날씨에 관계없이 매일 개원하여 환자들이 계속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일부터 시작하였다. 에비슨이 제중원의 기특을 잡아가고 있던 중에 한 번은 그가 지방에 갔다 온 사이에 운영을 담당하던 주사들이 부정행위를 저지른 것을 보고 사직하려고도 하였다. 제중원은 원래 의술은 선교부가 맡고 재정은 왕실이 지원하기로 했으나 1892년부터 재정지원이 원활하지 못하였다. 이는 계속된 정세의 혼란과 부정부패한 관리들이 환자들로부터 금품을 쟁취한 일의 오명, 의약비 유용의 문제 등으로 인해 재정지원이 제대로 되지 않았고 그에 따라 의료 실적이 부진해졌기 때문이다. 체제상으로는 왕립이었지만, 주사들이 제중원의 건물 임대 및 운영비등을 횡령하고 있었다. 에비슨은 이런 문제에 맞섰다. 마침내 제중원은 1894년 9월 26일에 종래의 왕실 병원에서 북장로교 선교부로 이관되었다. 건물 부지와 수리, 증축에 관한 모든 비용도 다 지불하고 정부 병원 체제의 제중원 운영권을 완전히 북장로교 선교부로 이양하게 되었다. 그리고 주사들을 대부분 해임시키고 하인들도 해고하는 대대적인 개편이 일어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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