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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중원의 역사

제중원 병원 건물의 신축

니콜라 테슬라 2021. 7. 21.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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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비슨의 집요한 요구와 쇄신은 '선교의사의 변고와 저항이 이었다기보다는 운영의 정상화를 위한 선교부, 제중원, 조선 정부, 미국공사관의 협의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그의 활동에 힘입어 제중원의 여러 난제들이 해결되고 새 출발의 전환점을 맞았다. 조선 정부가 병원 운영에서 물러나고 1894년 9월부터 새로운 출발을 하였다. 이후에 제중원은 완전한 선교기관으로서 소임을 다하게 되었다. 후에는 선교부가 독자적으로 모금해서 새 병원 건물을 마련하고 효율적으로 운영해 나갈 수 있는 체제를 갖추었다. 병원 경영도 체제 개편 첫해인 1894년에는 외래진료환자 1,398명, 입원환자 15명이었으나 그 후 해마다 증가하여 1902년에는 외래환자가 6,666명 입원환자가 230면으로 증가하였다. 자유롭지 못했던 병원 예배도 국왕의 양해를 받아 시행하기 시작하였다. 

 

에비슨
에비슨

병원의 신축

에비슨이 이룬 가장 큰 공적은 세브란스병원의 신축과 세브란스의학교로의 획기적인 발전이었다. 그 계기는 에비슨이 안식년을 맞아 모국으로 귀환했을 때 이루어졌다. 1900년 뉴욕에서 열린 에큐메니컬 선교대회에서 그는 의료선교의 예양 문제에 관해 연설하면서 여러 개의 작은 병원을 난립하기보다 하나의 좋은 연합의료기관을 설립할 것을 역설하였다. 이 주장에 호응한 이가 세브란스였다. 그는 10,000달러를 기부하기로 하였다. 이에 대해 평양 지회를 중심으로 한 선교사들은 병원의 확장과 의료선교 활동의 축소를 내세우며 그 비용으로 복음 전파에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강력히 펼쳤다. 에비슨과 언더우드를 비롯한 서울지회 선교사들은 물론 세브란스는 병원의 확장 신축과 의료선교의 중요성을 내세우며 맞섰다. 선교부도 현지 선교회의 대립 안 때문에 브라운 총무를 파송하기도 했으나 마침내 기부자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중국보다 서울에 병원을 세우기로 결심한 세브란스는 병원 식 축부지 대금 준제로 조선 정부와 의견 조율이 이루어지지 않자 5,000달러를 추가로 기부하여 남대문 밖의 부지를 매입하고 병원과 의학교를 건축할 수 있게 하였다. 이어 1907년에는 그의 이름으로 지어진 병원과 의학교를 돌아보고 30,000달러를 더 기부하였고 그 후에도 오랫동안 재정적인 지원을 하였다. 신축된 병원은 제중원이 아닌 세브란스 병원으로 개명되었다. 이때  에비슨은  "세브란스병원은 국왕 폐하의 후의에 의해 1884년 알렌이 세운 왕립병원을 바로 승계한 것"이라고 공표하였다. 비록 이름은 바꾸었지만 제중원의 역사를 승계함을 분명히 한 공포였다. 에비슨은 병원의 신축 후에 각종 의학 교재를 편찬하여 한국인 의사의 양성을 위한 의학교육에 힘썼다. 이후 병원과 의학교육이 보다 활성화되었고, 의사 허스트도 세브란스의 비용으로 파송되어 의료진도 보강되었고 아버클과 같이 간호하는 선교사도 오게 되었다. 세브란스 병원은 에비슨을 비롯한 서울 선교지 회의 성원에 힘입어 한국 굴지의 종합병원과 의학교가 되어 그 면모가 쇄신되었고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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