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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중원의 역사

제중원의 역할과 기능

니콜라 테슬라 2021. 7. 21.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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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들은 제중원의 설립을 선교의 전기로 삼고 운영체계와 재정문제에서 조선 정부와 합작함으로써 그 운영도 원활히 이끌어갈 수 있었다. 조선 정부에서는 새로운 의료체제 도입 계획에 따라 서양의술을 도입해 혜민서를 대신할 병원의 설립을 구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병원에 광혜원, 제중원의 이름을 부여하여 혜민서의 기능이 어지게 하였다. 선교부도 나름대로 이 일을 평가하였다. 북장로교와 북감리교의 첫 내한 선교사인 알렌과 스크랜턴은 모두 의료선교사였다. 그들이 환자를 직접 돌보며 보여준 의료봉사 활동은 다른 여러 면에서 여파를 남겼다. 연희전문 최초의 학감이었고 사제였으며 미국 북 장로교회 한국선교회 50년 역사를 정리했던 로즈 선교사는 선교 초기에 의료선교 사역을 파고드는 쐐기였다고 평가했다. 제중원의 역할은 의료선교 외에도 한국교회 선교역사의 여러 분야에서 다음과 같이 다양하였다.

 

제중원-조선관리인

기독교 선교의 관문

선교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의료선교는 선교활동의 장을 열었다. 1880년대 말까지 선교사의 입국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선교사들은 계속 내한하였다. 그들의 입국 통로는 제중원 의사나 교사라는 직함을 받는 것 밖에 없었다. 이처럼 제중원은 선교사들을 입국시키는 관문의 역할을 하였다. 알렌은 공사관의 공의로 왔다가 제중원 원장이 되었고, 언더우드는 제중원 교사로 내한했으며, 이후에 다른 선교사들은 제중원의 의료 담당으로 입국하였다. 

한국의 의학교육, 간호교육, 고등교육의 산실

제중원은 개원 후에 환자를 치료하면서 의학교육을 병행한 일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알렌은 조선 정부에 병원 건설 안을 제출할 때 이미 의학교육을 향한 뜻을 밝힌 바 있었다. 그 후 언더우드가 함께 사역하기 시작하면서 실질적으로 의학반이 운영되었다. 1885년 12월 1일에는 의학교를 설립하는 문제에 관해 포크 공사와 의견을 나누기도 하였다. 그는 공립 의원 규칙 전문에 명기된 것에 의거하여 조선인 의사를 양성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알렌은 언더우드와 헤론을 교수진에 포함시키고 1886년에 각도의 감영에서 엄선한 16명의 학생들을 받아들여 제중원 의학당을 설립하였다. 이는 1886년 3월 29일에 개교해서 최초로 서양의학교육을 시작하였다. 의학 교육부를 설치하고 학생을 모집하고 교육을 실시하였다. 이 일은 한국 현대의학뿐만 아니라 고등교육의 시초가 되었다. 7월에는 1차로 선정된 16명 중에서 12명만 선발하여 계속하였다. 알렌이 화학을, 언더우드가 영어, 화학, 물리를, 헤론이 의학을 담당하였다. 해부학, 약 조제법, 간호법 등을 가르쳤고 수업은 오전 7시에 시작하여 오후 4시경까지 진행되었다. 그런데 의도했던 것과 달리 의사 양성이 순조롭게 진척되지 못했고 조선 정부의 인가도 박지 못했으며, 헤론마저 죽음을 맞아 1890년경에는 명맥만 겨우 유지되었다. 그러다 에비슨이 내한한 후에 1899년에 제중원의 학교가 설립되어 의학교육이 향상되었다. 제중원 의학당은 병원 설립 초기부터 한국인 의사 보조원의 양성을 최초로 시작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서양식 교육에 별다른 호응을 하지 않던 사회에 이 역할은 세브란스병원과 부속 의학교로 이어져 한국 최초의 의과대학을 탄생시키는 결실을 맺었다. 후에는 연세대학교 의과대학과 간호대학으로 발전하는 초석이 되었고 한국 고등교육의 산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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