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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중원의 역사

제중원의 당시 사회적인 역할

니콜라 테슬라 2021. 7. 22.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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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외교적 가교

제중원은 초기에 알렌이 주도한 협정에 따라 조선 정부가 병원의 운영경비를 부담하고 미국 북장로교 선교본부가 실질적인 운영을 담당하여 조선 정부의 의료기관인 동시에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 산하의 의료선교기구라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었다. 달리 말하자면 조선 정부와 미국 선교본부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협동 의료기관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나아가 미국공사관의 협조를 받아 개원되었기 때문에 한미 양국 외교의 산물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기독교 선교를 계속 금지시키려 했던 조선 정부와 복음 전파를 개시하려 했던 선교부가 '의술'에 기반을 두어 서로 연합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가 있다. 실제로 제중원은 조선 정부의 신임을 얻어 정부와 선교부 사이에서 가교의 역할을 하였다. 알렌은 왕실의 어의와 제중원을 대표하는 의사로 활동하였고, 그 후에 온 의료 선교사들도 왕실의 시의 가 되고 관직도 받았다. 고종은 알렌에게 병원 문제 외에 대외관계에 관해서도 자문을 구했다. 청국에서 귀국한 대원군도 알렌을 찾았을 정도였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춘생문 사건을 전후해서는 선교사들이 고종의 불침번까지 서게 되었다. 

 

재건축한-제중원
재건축된 제중원

서양 문물의 수용과 사회개혁의 발판

당시 동도서기라는 통념에 따라 동도 우월의식을 지닌 많은 사람들은 의료선교사들의 의술을 통해 서양의술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으며 새로운 의료장비와 시설을 통해서 서양문물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보수적인 사람들이 완고한 태도를 버리고 개화와 근대화에 호응하는 계기가 되었다. 제중원은 환자를 치료할 때 당시 사회의 계층 간 차별의식에 구애받지 않았다. 백정 박성춘의 아들인 박서양이 제중원의 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었지만 그가 졸업생이 되어 의료봉사는 물론 독립운동에도 기여했던 사실은 가독교 의료 선교사업이 한국인들을 일깨워 사회개혁을 이루는 데에 일조하려는 목표를 지니고 있었던 사실을 입증하는 단적인 예가 된다. 제중원은 남녀 환자들을 다 받았고 초기에는 여자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여자 의사들을 초빙하였다. 초기에 간호보조원으로 기녀 5명을 선정하여 여자 의학생이라고 하고 의술과 간호학을 학습케 했다. 그리고 간호 업무를 위해시도 여자 선교사를 파송하도록 본부에 요청하였다. 이 일은 의사와 간호사들이 남녀 구별 없이 진료와 보조를 자유롭게 하는 데도 일조하였다. 이 일에는 계층의 장벽을 타파하는 사회적 의미와 아울러 복음선교의 문호를 모든 계층에게 개방시키는 선교사적 의미가 있다. 선교사들은 백정부터 규방 여인, 정부 괴위 관료, 왕과 왕비에 이르기까지 계층을 가리지 않고 치료하였다. 한편 제중원 건물의 신축은 고든의 설계와 감독으로 이루어졌다. 그는 다른 여러 교회 건물과 선교사 주택도 건축하면서 서구 건출 술을 소개하고 도입하는 데에 기여하였다. 

결론

이렇듯 제중원은 당시 조선에서 정치적 가교역할과 서양 문물의 소개하고 수용하게 하는 사회적 개혁의 발판을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제중원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 의학 발전이 가능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드는 게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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