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중원 개원 이래로 에비슨이 제중원을 선교회 기관으로 새롭게 출범시킬 때까지 이곳에서 활동한 선교사들은 모두 10명이었다. 에비슨이 제중원을 완전히 선교회 소관으로 이전하고 세브란스 병원으로 이름을 바꾸기 전까지 이 과정에 합세한 이들도 10명이나 된다. 이 중 에비슨과 하디는 캐나다 출신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미국인이었다. 분쉬는 독일인으로 에비슨의 요청에 따라 잠시 제중원에서 외과 치료를 도왔지만 선교부에서 파송된 사람은 아니었고 고종과 왕실의 주치의란 명분에서 행한 일이었기 때문에 이 들에서는 그를 제외하였다. 고든은 비록 건축가였지만 선교부 파송으로 왔기 때문에 이 논의에 포함시켰다. 언더우드의 경우에는 의료선교사로 내 한하ㅣ는 않았지만 제중원 교사 자격으로 내한하여 제중원에서 의사 보조원, 간호..

정치 외교적 가교 제중원은 초기에 알렌이 주도한 협정에 따라 조선 정부가 병원의 운영경비를 부담하고 미국 북장로교 선교본부가 실질적인 운영을 담당하여 조선 정부의 의료기관인 동시에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 산하의 의료선교기구라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었다. 달리 말하자면 조선 정부와 미국 선교본부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협동 의료기관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나아가 미국공사관의 협조를 받아 개원되었기 때문에 한미 양국 외교의 산물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기독교 선교를 계속 금지시키려 했던 조선 정부와 복음 전파를 개시하려 했던 선교부가 '의술'에 기반을 두어 서로 연합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가 있다. 실제로 제중원은 조선 정부의 신임을 얻어 정부와 선교부 사이에서 가교의 역할을 하였다. 알렌은 왕실의 어의..

선교사들은 제중원의 설립을 선교의 전기로 삼고 운영체계와 재정문제에서 조선 정부와 합작함으로써 그 운영도 원활히 이끌어갈 수 있었다. 조선 정부에서는 새로운 의료체제 도입 계획에 따라 서양의술을 도입해 혜민서를 대신할 병원의 설립을 구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병원에 광혜원, 제중원의 이름을 부여하여 혜민서의 기능이 어지게 하였다. 선교부도 나름대로 이 일을 평가하였다. 북장로교와 북감리교의 첫 내한 선교사인 알렌과 스크랜턴은 모두 의료선교사였다. 그들이 환자를 직접 돌보며 보여준 의료봉사 활동은 다른 여러 면에서 여파를 남겼다. 연희전문 최초의 학감이었고 사제였으며 미국 북 장로교회 한국선교회 50년 역사를 정리했던 로즈 선교사는 선교 초기에 의료선교 사역을 파고드는 쐐기였다고 평가했다. 제중원의 역할은..

에비슨의 집요한 요구와 쇄신은 '선교의사의 변고와 저항이 이었다기보다는 운영의 정상화를 위한 선교부, 제중원, 조선 정부, 미국공사관의 협의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그의 활동에 힘입어 제중원의 여러 난제들이 해결되고 새 출발의 전환점을 맞았다. 조선 정부가 병원 운영에서 물러나고 1894년 9월부터 새로운 출발을 하였다. 이후에 제중원은 완전한 선교기관으로서 소임을 다하게 되었다. 후에는 선교부가 독자적으로 모금해서 새 병원 건물을 마련하고 효율적으로 운영해 나갈 수 있는 체제를 갖추었다. 병원 경영도 체제 개편 첫해인 1894년에는 외래진료환자 1,398명, 입원환자 15명이었으나 그 후 해마다 증가하여 1902년에는 외래환자가 6,666명 입원환자가 230면으로 증가하였다. 자유롭지 못했던 병원 ..